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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그때 그시절)

그냥은 2008. 1. 15. 22:32



▲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인 조선인촌주식회사 전경.
이 공장은 1917년 10월 인천 동구 금곡동에 설립됐다.

 

성냥 공장 아가씨라는 노래가 있었다.

80년대 이전 까지 군대에서 사병생활을 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알고있는 노래이다.

물론 정식 군가는 아니고, 진중 가요라고도 할수없는 통속적인 노래이다.

 

이곳에 소개 하기가 민망할 정도로 저속한 그 노랫말은  이렇게 시작된다.

 

인천에 성냥공장

성냥공장아가씨

하루에 한갑 두갑 낱갑이 열두갑

 

치마밑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때

치마밑에 불이 붙어.....  ♪~♩~

 

노랫말의 내용은 인천에 있는 성냥공장 아가씨가

치마 밑에다 몰래 성냥을 감추고 나오다가 불이나서 경을 쳤다는 내용이다.

성적으로 한창 왕성한 시기에 사회에서 격리되어 있던 사병들인지라

약간의 외설성이 담긴 이런노래가 불려진 것은 이해가 갔다.

불현듯 그 노랫말이 떠오르면서 새삼스럽게 몇가지 의문이 떠올랐다.

 

1)하필이면 성냥공장 아가씨일까? (방직공장, 신발공장이 아니고)

2)하필이면 인천일까? (서울,부산,대구,대전등도 있는데)

3)하필이면 하찮은 성냥을 감추고 나왔을까? (돈이나 귀금속도 아니고)

4)하루에 한두갑이면  일년이면 수백갑이지 왜 열두갑일까?

5)성냥은 황에다 힘을주어 그어야 불이 붙는데 불은 왜 났을까?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그 의문이 대부분 풀렸다.

우리나라에 성냥이 보급된 경로는 다음과 같이 나왔다.

 

1880년 개화승(開化僧)이동인(李東仁)이 일본에 갔다가 수신사(修信使)김흥직 과 동행 귀국할때

처음으로 성냥을 가지고 들어왔으나 일반에게 생활용품으로 대중화 하기는

국권 피탈 후인 1910년대에 일본인들이 인천에 朝鮮성냥을 설립한것을 비롯하여

군산,수원,영등포,마산,부산에공장을  설립하여 생산 판매함으로써 가정용품으로 보급되었다.

그러나 한국인에게는 공장설치도 일체 허가하지않았을 뿐만아니라 기술도 배우지 못하게 하여,

한국시장을 독점하고서는 성냥1통에 쌀1되라는 비싼 값으로 판매하였다.

1945년 8.15 광복후 처음으로 한국사람의 손으로 인천에 대한성냥을 비롯하여 전국에

300여개의 수공업형태의 공장이 설립되어 월간 400만포의 성냥을 생산공급하게 되었으며,

한국전쟁 후에는 150개 업체로 정리되었고 1970년대 부터 자동화 시설로 전환함에 따라

업체규모의 대형화로 업체수가 20개로 감소 되었다 (이상 네이버 백과사전)

 

즉, 우리나라 최초의 성냥공장은  일본인이 인천에 세운 조선성냥이고,

일본인들은 성냥의 독점화를 위해 조선인의 기술 습득을 막았다.

그로 인해 일제강점기 때는 성냥1통이 쌀1되였다.

한국인이 세운 최초 성냥공장도 인천의 대한 성냥이였고 

성냥이 자동화 시설을 갖추고 대형화 된것은1970년 이후 였다

또한,우리나라는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 이전까지 국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했다. 소득수준이 낮았으며 국민 대부분이 돈이없었고 소비도 많지않았다.

신발도 짚신을 신거나 집주위에서 맨발로 다닐많큼 절약했고,

옷도 천을 사다가 집에서 해입는 경우가 많았다.

군것질은 보통사람에게는 사치였고, 외식이란 말 자체가 없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절약 할수없는것이 있으니 성냥이었다. 전기가 일상화되기 1970년대 이전까지도

매일 불(남포불,등잔불,촛불등)을 켜기위해 성냥이 있어야 했고, 전기 밥솥이 없으니

밥짓기위해서도 성냥이 있어야 했으며, 라이터가 귀한시절이니 담뱃불도 성냥이었다.

즉,성냥은 집집마다 반드시 소비해야하는 당시로서는 불황이없는 황금알을 낳는거위였던것이다.

 

1.방직공장,고무신 공장보다 성냥공장이 더 필요 했으니 성냥공장 아가씨였고..

2.일본인이 세운 최초의 성냥공장과 해방이후의 최초의 성냥공장이 인천에 있었으니

  인천의 성냥공장 이었으며,

3.성냥은 결코 하찮은것이 아니고 한통에 쌀1되의 고가였으니

  감춰서라도 가지고 나올만한 가치가 있는것이다.

 

4.그러면 하루에 한두갑이면 1년이면 수백갑인데, 왜 열두갑일까?

  이부분은 필자의 상상이다

  하루에 한두갑이란 조그만 휴대용 성냥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치맛속이라고 해도 커다란 성냥통을 몸에 숨기고 나올수는 없었을 것이다.

  일년에 열두갑이란 큰 성냥통으로 열두갑일 것이다.

  하루에 작은 성냥갑으로 한두갑 훔쳤다면 1년이면 큰통으로 열두갑쯤 될것이다.

  성냥공장 아가씨는 가난한 부모를위해서 또는 힘들게 공부하는 동생들의 학비를 위해서

  먹을것 아끼고 입을것을 절약하며 일을 했다.

  그러다가 명절때 귀성 하는날 그아가씨들이 고향에 가져가는 선물보따리 속에는 귀금속은

  아니지만 집에서 꼭 필요한 생필품인 성냥, 눈물겨운 그 성냥이 들어 있었던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을 훔치다 들켜서  인간 이하의 수모를 받기도 했을 그 시절의 누이들을 생각하면

  서러운 마음도 든다.

 

5.치마밑에 감춘 성냥에서 왜 불이났을까?

  최초의 성냥은 마찰 성냥이었다. 마찰성냥이란 나무개비 끝에 붙어 있는 발화성 약제를 

  황이아닌 벽이나 구두굽등에 마찰시켜도 어느곳에서나 발화되는 성냥을 말한다.

  황린성냥,적린성냥,황화인성냥이 이에 속한다.

                          (일명 딱성냥 이라고도...6~70년대 서부활극에서 자주등장) 

  마찰성냥을 황린을 발화연소제로 사용한것으로 독성과 자연발화의 위험이 있으므로

  국제적으로 제조 금지되고 그것을 보완 한것이 지금의 안전성냥이다.

  물론 마찰성냥이라고 해서 가만히 있는데도 옷속에 불이 붙을 정도로 허술한것은 아니지만,

  이것을 과장되게 표현한것이'치마밑에 불이붙어' 인것이다.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이노래는 젊은 사병들의 이성에대한 욕구를 표현한 외설적인 노래이다.

  그러나 그런 노래가 탄생한 이면에는 가난했던 옛날의 아픈 기억이 있다.

  그시절 우리누이들의 눈물겨운 아품이 스며있는 성냥공장 아가씨!

  외설적인 생각을 떠올리며 부르기에는 죄스러운 노래이기도 하다.....

                                                                                        

출처 : 창영59회
글쓴이 : 김선길(12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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