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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송창식 - 상아의 노래

그냥은 2007. 1. 3. 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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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창식 - 상아의 노래

 

                  채풍 작사 / 김희갑 작곡

 

    바람이 소리없이 소리없이 흐르는데
    외로운 여인인가 짝잃은 여인인가
    가버린 꿈속에 상처만 애달퍼라
    아 ~ 아 ~ 못잊어 아쉬운
    눈물의 그날밤 상아 혼자 울고 있나


69 년에 김희갑이 만들어 송창식의 노래로 알려져 있는
'상아의 노래'를 처음 부른 사람은 이미자였는데
트로트풍의 노래만 불렀던 이미자는 곡을 받은 다음에도
판을 내자는 말도 하지 않아 다시 드라마 주제가로 넘어가
송창식이 마이크를 잡았답니다.

 

송창식은 이 노래 때문에 망신을 당한 적도 있다네요.
80 년대 지방공연을 갔다가 공연이 끝난 뒤 신청곡을 받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때 관객이 신청한 노래가 '상아의 노래'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당시 '상아의 노래'의 멜로디가
떠오르지 않아 결국 노래를 부르지 못하고 무대를 내려오고
말았다는 에피소드가 있답니다.

 

요즘 7,80 년대 추억 바람이 부니 윤형주가 다시 트윈 폴리오를 하자는 제의에
그동안 윤형주는 음악적으로 전혀 발전이 없었기 때문에 함께 듀엣을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지요. 윤형주에게는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것으로 충분할지 몰라도
자신은 추억을 먹고 살지는 않겠다면서요 .

 

노래방 저작권료로 한 달에 1000 여만원이 들어 오니 먹고 살 걱정 없고
음악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은 우리 나라에 단 한 명도 없다며,
그런 사람들과 돈을 벌기 위해서 더 이상 앨범을 만들 생각이 없다고
15 년이 넘도록 일체의 새로운 앨범 작업도 않고, TV에도 거의 얼굴을
비치지 않고 지방을 돌며 제한적인 라이브 콘서트 무대에만 선다는 송창식.

'오전 5시 취침, 오후 2 ~ 3시 일어나 몇 시간 운동'이라는 일반인과는
전혀 다른 패턴의 기인(奇人)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국민 가수" 송창식

 

음악이든 생활방식이든 모든 점에서 송창식은 '둘도 없는 사람'이다. 음악은 누구도 견줄 수 없을 만큼 독창적 세계를 드러낼 뿐 아니라 살아가는 모습 또한 범인(凡人)의 그것과 크게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와 절친한 가수 조영남은 송창식을 가리켜 “일반적인 잣대로는 풀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묘사한다. '독자성의 광채를 발하는 비범한 음악' 그리고 '별난 사람', 그 말이 송창식을 축약하는 표현이 될 것이다.

 

'낭만파 시인' '저잣거리의 현자(賢者)'와 같은 그럴듯한 것들도 있지만 밤에만 활동한다고 하여 '밤창식' '별창식' 그리고 모든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 해서 붙은 '왜창식'이란 별칭이 먼저 떠오른다. 그것들은 한마디로 '기인(奇人)'임을 말하기 위한 곁가지 수식들 아니던가.

 

송창식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1970년대 우리 가요계를 완전 정복한 주인공이다. 통기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된 그 시대 포크문화를 대표하면서 그의 노래들은 모든 세대와 계층의 가슴에 메아리쳤다. 대학생들은 저항의 찬가인양 '고래사냥'을 목놓아 외쳤고 동네 코흘리개 아이들도 마냥 '왜 불러'를 따라 불렀으며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도 '상아의 노래'를 흥얼거리며 트로트에서 느끼는 구수함과 애절함을 맛보았다.

 

별로 잘 생긴 얼굴도 아니었지만 듀오 트윈 폴리오 시절 부른 '하얀 손수건'은 그를 '여학생들에게 생명과도 같은 존재'로 만들었고 대중가요를 외면한 고매한 사람들마저 가곡 풍의 '그대 있음에'에 감동했다. 그가 포크가수 가운데 유일하게 방송사의 가수왕(1975년) 자리에 오른 것도 그처럼 남녀노소와 지위고하를 막론한 광대한 흡인력 때문일 것이다. 국민가수라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이미 국민가수였던 셈이다. 그렇기에 1980년대가 조용필시대, 1990년대가 서태지시대라면 '1970년대는 송창식시대였다'는 규정은 아주 자연스럽다.

 

출처 : 음악과 우정 그리고 추억
글쓴이 : 다빈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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